이황과 율곡 이이의 교육 이념과 사상을 바탕으로 현대 교육에 접목시켜 보려 한다. 그런데 이들은 16c의 사람이고 현대는 21c의 시점에서 이들의 지혜로 어떻게 현대교육이념의 문제를 논하려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항상 불변하는 것이고 교육의 본질도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는 것
성리학의 교육관
성리학에서의 교육
자연·우주처럼 성실함은 오직 성인에게만 해당되는 것
나머지 는 그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들
→ 인간들은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誠之者)을 삶의 기본자세로 삼아야 하며 이런 자세가 바로 인간의 길(人之道)로 여겨졌던 것이다.
즉, 성실
엄밀성만이 추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주자학이 한국의 성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학사상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이황과 이이의 비교 분석
1)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시호는 문순(文
이황이 주목할 만한 교육사상가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황의 교육사상은 성리학적 교육철학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기 않으면서 그것을 더욱 정교화하고 심화시킨 결과인 것이다.
※ 조선 성리학의 두 가지 입장
학파
지역
특징
선구자
대표자
후계자
주리파
(도덕적원리)
영남
이황의 교육사상
주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동방의 주자(朱子)’ 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정치에서 은퇴한 후 도산서원을 짓고 사색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노력.
사상의 중핵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기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가치관의 혼란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을 하였으며 그것을 밑받침해 준 것은 교육이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교육사 교재에 소개된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교육사상가 및 실천가 중 1명을 선정하여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해 보겠다.
이황보다 한 세대 후인 선조대에 율곡 이이가 출현한다. 16세기는 이른바 사대사화로 불리는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년),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년) 가운데 3회의 사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사림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 시기에 사단칠정론
이황의 이기 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적인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현실 문제의 개혁을 과감히 주장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귀일하고 사상 및 신앙의 통일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자, 이러한 대세를 타고 주자학을 더욱 이도하여 마침내 조
Ⅰ. 서 론
이황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정치 무대에 나섰다. 그는 조선 중기에 국정을 주도하고 유능한 관료들과 함께 정치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황의 정치 경력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퇴계산에 은거하며 불운과 슬픔 속에서 생활했다. 이런 어려움과 퇴폐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